사례 2 네슬레 이유식 사업

 

기업윤리 - 네슬레 이유식1)

제3계 국가에 안전하지 않은 제품 판매하기

여러 제품을 보유하고 있거나 경영다각화를 추구하는 국제기업은 제품 하나에 대한 평가가 안 좋거나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쁜 것을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곧 해결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로 간주하여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네슬레의 이유식 제품에 대한 문제는 회사의 예상과 달리 부정적인 언론보도와 소비자들의 저항 때문에 더욱 악화되어 갔다. 몇 달이 지나도 비난의 목소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비난은 개발도상국가에서 판매되는 이유식에 대해서만 국한되지 않고 네슬레의 다른 제품들까지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1. 배경

1) 문제의 발단

1970년대 초반에 분말이유식 제조업체들이 제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유아 사망률이 높아졌다는 의혹이 제기 되었다. 이유식 오용과 유아 사망률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여러 국제회의에서 의료 전문가, 업계대표, 정부 공무원 사이에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아직 들어나고 있지 않았다.

1974년 영국의 자선단체인 ‘빈곤과의 투쟁(War on Want)'에서 『유아 살인자』라는 28쪽 분량의 팸플릿을 발행하여 스위스의 네슬레와 영국의 유니게이트가 아프리카에서 이유식 마케팅을 무분별하게 펼치고 있음을 비난하였다. 이 팸플릿 덕분에 일반 소비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1년 사이에 크게 확산되었다. 독일 제3세계 워킹 그룹에서는『유아 살인자』를 내용을 약간 수정하여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간하며 제목도 『네슬레가 아기들을 죽이고 있다』로 새로 붙였다. 영국판 자료에서는 이유식 업계 전체를 비판한 데 비하여 독일 시민단체에서는 네슬레를 표적으로 하여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네슬레 본사 간부들은 시민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으며 2년 동안 재판이 계속되었다.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재판에서 네슬레가 이기기는 했지만 법원은 네슬레에게 현재의 마케팅 방법을 재검토하라고 충고하였다. 네슬렝의 한 간부는 “우리가 법정 소송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PR측면에서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영아를 살해했다는 비난은 반전단체와 대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적당한 주제였다. 네슬레는 이 사태를 과학적이고 영양학적인 수준에서 다루려고 했지만 반대 세력들은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2)

2) 네슬레

네슬레는 동종 업계에서 공식적으로 네슬레 알니멘타나 또는 S.A. Nestle Alimentana, S.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사는 스위스 브베에 있다. 이 회사는 다국적기업으로 1983년 매출액이 125억 달러에 달했다.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식품과 화장품업계의 여러 회사들을 소유하여 인스턴트 음료, 유제품, 화장품, 냉동식품, 초콜릿, 약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판매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품군은 유제품·인스턴트 음료·주방제품 및 잡화였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식을 포함한 유아용 식품과 식이요법 제품은 전체 그룹 매출액에서 10% 미만이었다. 네슬레는 기업 인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75년 식품 가공업체인 리비와 맥닐앤 리비(Libby, McNeil & Libby)를 사들였다. 1979년에는 유아용 식품을 생산하는 비치 넛(Beech-Nut)을 인수하였으며 콘택트렌즈 업체인 쿠퍼비전(Cooper Vision), 잘 알려진 캔디 브랜드인 청키(Chunky), 빗오 허니(Bit-O-Honey), 레이지네츠(Raisinettes) 등을 인수했다. 그 밖에도 커피 컴퍼니(Coffee Company)와 카네이션(Carnation)도 인수하였다.

3) 이유식 사업

  네슬레는 미숙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우유가 주원료인 제품을 1867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시판했다. 이 제품은 음식을 섭취할 수 없는 미숙아를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식품이었다. 모유대신으로 사용하기 위한 이유식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초기이다. 이유식은 6개월 미만의 유아를 위해 특별히 제조된 식품이며 젖소의 우유를 원료로 모유와 비슷하게 제조되었다. 오늘날에는 유아들에게 먹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유제품이 출시되어 있는데 영양 성분의 함량이 아주 높은 제품(모유화한 이유식)에서 낮은 제품(다양한 분유·무가당 분유·감미 농축 분유)까지 여러 종류의 제품이 나와 있다.

이유식 매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선진국에 430만 명의 신생아가 출산한 1957년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이후 출생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같은 추세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유식의 매출과 수익률이 하락하자 이유식 업계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이 찾아낸 곳이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아프리카, 남미, 극동지역의 개발도상국가들 이었다. 이유식 제품의 총매출액은 약 15억 달러에 달하는데 개발도상국가에서 거둬들인 수입이약 6억 달러였다. 네슬레는 개발도상국가의 이유식 시장에서 40~50%의 시장 점유율을 뉴지하고 있었다. 경쟁업체로는 미국기업인 어메리칸 홈 프로덕츠(American Home Products), 브리스톨 마이어스(Bristol Myers), 애봇 랩스(Abbott Labs)가 있었다. 이들이 전체 시장의 20% 정도를 차지하였으며 다른 외국기업들이 나머지 시장을 차지하였다. 1981년 이유식 시장은 연간 15~20% 정도 성장하고 있었다.3)

2. 쟁점

 

1) 부적합한 시장환경

  개발도상국가에 사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열악한 공중위생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문맹인 경우가 많아 이유식 오용은 필연적인 결과인 것으로 여겨진다. 오염된 강이나 공동우물에서 물을 퍼다 쓰는데 오염된 물통에 담아 집으로 가져 온다. 냉장고는 꿈도 못 꾸며 연료비는 아주 비싸다. 결국 분말로 된 이유식을 오염된 물에 섞어서 탈 뿐만 아니라 소독되지 않은 우유병에 담게 된다. 더구나 엄마들은 이유식을 좀더 오래 먹이기 위하여 물을 더 넣어 양을 늘리기도 한다. 자메이카 병원의 한 의사는 우우만 자란 4개월과 18개월 된 형제들의 영양실조 사례를 보여준다. 이유식 캔은 4개월 된 아이에게 3일 정도 먹이면 적당한 양인데 아이들의 엄마는 이유식을 묽게 타서 두 아이에게 14일이나 먹였다. 이 엄마는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며 집에는 깨끗한 물이나 전기도 없었고 12명의 아이들을 더 키우고 있었다.4)

개발도상국에서 모유 수유가 줄어들고 분유 사용이 증가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5)

  첫째, 사회 문화적인 환경변화이다. 이유식은 사회적 이동성을 대표하며 매우 현대적인 제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환하게 미소 짖고 있는 백인 아기 사진이 찍혀 있는 이유식 캔은 부유한 백인 엄마가 자식들에게 이 제품을 먹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제품을 먹으면 건강이 좋아질 것 같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처음에는 개발도상국이 고소득층이 서구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이유식을 구입하였다.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행동이 상류사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며, 저소득층도 이 행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둘째, 모유 수유에서 분유로 전환하게 된 데에는 전문 의료인의 역할도 크다. 여러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서 이유식을 추천했던 것이다. 여성이 처음으로 산부인과 병원을 찾게되는 것은 아이를 출산할 때이다. 병원에서 어떤 제품이나 선물을 받게 된 여성은 별 거부감없이 추천받은 제품을 받아드리게 된다. 또한 병원에서 시중보다 좋은 것을 추천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기 쉽다. 출산 후 아기들은 대개 12~48시간 동안 엄마와 떨어져 지나게 되는 데 엄마가 모유를 수유하려는 계획과는 관계없이 아기는 분유를 먹게 된다.

셋째, 이유식 제조업체들의 마케팅과 판촉활동이다. 1951년 싱가포르에서는 3개월 된 아기의 80% 정도가 모유를 먹고 있었다. 1971년에는 이 수치가 5%로 감소하였다. 1966년 멕시코의 모유 수유 비율은 6년 전과 비교하여 40%가 감소하였다. 1973년 칠레에서는 3개월 이전의 영아들 가운데 분유를 먹인 영아들의 사망률이 모유 수유를 한 영아의 사망률에 비해서 세 배나 높게 나타났다. 분유를 먹인 영아가 질병에 더 잘 걸리고 사망률도 더 높다는 통계 결과들도 많이 제시되었다.6)

2) 품질 관리 문제

네슬레는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품질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77년 3월 콜롬비아 종합병원 신생아실에서 사망자가 갑자기 증가했다. 네슬레 공장의 박테리아가 원인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25명이 사망한 후였다. 1977년 호주 보건부는 네슬레에서 생산한 오염된 이유식을 섭취한 134명의 영아가 심각한 질환 증세를 보인다고 발표했다. 호주에서의 문제는 1976년에 시작되었다. 네슬레 통갈라 공장에서 생산한 이유식 샘플에 박테리아 수가 늘어났는데 조사 결과 액체 우유를 분말 형태로 만드는 데 사용하는 스프레이 건조기에 균열이 생긴 것이 밝혀졌다. 박테리아는 심각한 위염을 일으키는 살모넬라균의 변종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외부에 밝히지 않았다. 네슬레는 생산을 중단하지 않은 제 기구를 소독했지만 박테리아는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네슬레는 이후에도 8개월 동안이나 건조기를 그대로 가동시켰다.7)

3) 제품 오용에 대한 비난

네슬레 입장에서는 개발도상국에서 제품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네슬레와 다른 이유식 업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다른 대한 식품에 비해 이유식 제품이 가지고 있는 효능을 무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식수 오염은 상업용 이유식뿐만 아니라 잡곡과 쌀로 만든 죽 같은 여러 대한 식품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곡물로 만든 죽의 경우 영양가가 낮을 뿐만 아니라 식수 오염과 요리에 사용되는 식기오염 그리고 영양 부족까지 더해 몇 배나 나쁜 결과를 나을 수 있다. 이유식을 타는 데 사용하는 식수가 오염되어 있고 용기도 오염될 수 있지만 이유식 제품이 곡물 죽 보다는 영양가가 높고 모유에 더 가깝게 만들어졌으므로 소화도 잘 된다. 이 외에도 이유식 업계를 비난하는 사람에 대한 반박으로는 개발도상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오염된 식수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수 오염을 걱정하지 않고 집에서 나오는 물로 이유식을 안전하게 타 먹을 수 있다.8)

4) 네슬레의 마케팅 활동에 대한 비난

네슬레는 개발도상국에서 공격적으로 마케팅 활동을 해왔다. 소비자뿐만 아니라 의사를 비롯한 의료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판촉 활동을 전개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이유식 판촉 활동을 벌였다. 라디오, 신문, 잡지, 옥외광고판 등 언론을 통한 홍보활동을 해왔고 확성기를 장착한 자동차도 활용했다. 네슬레는 판촉용으로 샘플, 젖병, 젖꼭지, 계량 스푼 등을 전 지역에 배포하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우유 간호사(milk nurse)들을 이용해서 직접 소비자들에게 홍보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이 방법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네슬레는 간호사나 영양사, 조산원을 200명 정도 고용했는데 이들은 우유 간호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비판 세력은 이들이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영업사원이며 산모들을 방문해서는 제품 샘플을 주고 모유 수유를 그만 두도록 설득한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우유 간호사들이 산모들에게 신뢰를 주는 유니폼을 이용해서 순진한 소비자들을 설득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의사와 다른 의료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이유식 제품을 홍보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야기 되었다. 이러한 홍보활동에서는 회사의 영업사원들이 소아과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관련 의료관련 전문가들에게 제품의 품질과 특징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종합병원, 개인병원, 그리고 의사들에게 무료로 포스터, 무료 샘플 등을 제공한다. 의사와 병원직원들은 의료 학회에 참석할 때 네슬레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비판 세력들은 이유식 판촉 활동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모유 수유 비율이 감소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증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게발도상국가의 이유식 매출은 계속 증가했다. 이들 나라에서 이유식 제품을 담배와 비누 다음으로 광고를 많이 하는 제품이 되었다. 1969년 바르바도스에서 실시한 연구에 의하면 병원이나 집에서 무료로 샘플을 받은 적이 있는 산모의 82%는 후에 동일 브랜드의 제품을 구입했다.9) 네슬레의 이유식 판촉활동에 대한 비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이유식 제품이 개발도상국 신생아의 사망률에 영향을 주었다.

- 신생아용 소책자에서 모유 수유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거나 아주 작은 지면만 할애하였다.

- 언론 홍보활동을 통해 가난하고 문맹인 산모들이 모유 수유보다 이유식을 먹이도록 은 근히 유도하였다.

- 광고에서 모유 수유를 구시대적이며 불편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 무료로 선물과 샘플을 주면서 산모들이 이유식을 먹이도록 직접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 병원에 부착된 포스터와 팸플릿, 우유 간호사를 통해서 이유식이 마치 ‘협회의 승인’을 얻었거나 ‘협회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 이유식 가격이 대부분의 소비자들에게는 무척 비싸 산모들이 이유식을 희석시켜 먹이는 문제가 발생한다.

 

3. 네슬레에게 불리해져 가는 상황

1970년대 초반 이후 이유식회사는 여러 단체들로부터 이유식 판촉활동과 광고활동을 줄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1970년과 1973년에 단백질 자문위원회(the Protein Advisory Group), 1974년에 세계보건총회(the World Health Assembly), 1978년에는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주위로부터의 비난이 커지자 네슬레를 비롯한 이유식업체들도 대응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네슬레를 비롯한 9개의 이유식업체들은 국제이유식기업협회(CIFI: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Infant Food Industries)를 결성하고 협회의 후원아래 변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제품 설명에 항상 모유가 최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광고에서 이유식은 모유를 보충하는 제품으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광고에는 가능하면 전문가의 조언을 넣으며 간호사 복장은 직업 간호사만이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책만으로는 점점 커지는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국제유아식네트워크(the International Baby Food Action Network)가 제출한 증거에 의하면 1977년에서 1981년까지 이유식업계가 규칙을 위반한 사례가 일천 건을 넘었다. 일부 비난세력은 “이유식업계에 자율적인 규제를 바라는 것은 KFC창립자인 커널 샌더스에게 닭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하였다.10) 이유식업계가 계속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977년 7월 미국에서 조직적인 불매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매운동은 다른 9개 국가로 퍼져 나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불매운동이 1982년 1월 16일까지 계속되었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그 후 2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불매운동은 전제 이유식업계가 아니라 네슬레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네슬레가 전 세계 시장점유율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업계 내의 다른 기업에 비해 안 좋은 소문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유식보호운동연합과 불매운동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였다.

  - 우유 간호사 제도를 전면 중지할 것

  - 무료 샘플을 배포하는 행위를 그만둘 것

  - 의료업계를 대상으로 이유식 판촉활동을 하지 말 것

  - 이유식 제품의 소비자 판촉과 광고를 중지할 것

  미국 전역에서 450개 이상의 단체가 불매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불매운동이 심했던 보스턴, 볼티모어, 시카고에는 이유식보호운동연합에서 5명의 상근직원을 둔 사무실을 개설했다. 수천만 명의 시민들이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네슬레 제품을 철수하도록 탄원하는 서류 등 여러 가지 서류에 서명을 하였고 일부 식료품점에서는 네슬레의 테이터스 초이스 제품을 진열대에서 치우기도 하였다. 대학에서도 초콜릿, 차, 커피, 핫 초콜릿 등 여러 제품에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불매운동은 효과를 나타내 네슬레의 매출과 수익률이 감소하였으며 이 회사에 대한 비난 여론을 구체화시켜 정부의 개입을 이끌어냈다. 뉴기니 정부는 1977년 여름 아기에게 인공적인 이유식을 먹이는 것을 제한하는 엄격한 법을 제정했다. 세계보건기구는 1981년 5월 이유식업계에만 적용되는 광고 제한 규정을 채택했다. 프랑스에 있는 유럽의회에서는 유럽 공동체 10개국 모두가 세계보건기구의 규정을 엄격하게 시행하는 데 찬성했다. 또한 유럽의회는 회원국 기업들의 해외 자회사들도 규정을 반드시 따르도록 하였다.

 

4. 네슬레의 대응

비난 여론에 대한 네슬레의 초기 대응책은 별 효과가 없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1977년 전 세계적으로 네슬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네슬레로서는 더 이상 비난세력을 무시하면서 그들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리기는 어렵게 되었다. 네슬레는 불매운동이 증가하고 회사에 대한 무수한 비난이 생겨나는 것은 잘못된 PR활동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대응 전략을 모색하였다. 네슬레는 PR부서를 기업 책임실(Office of Corporate Responsibility)로 승격시켰다. PR업무를 위해 세계 최대의 PR회사인 힐 앤드 놀튼(Hill & Knowlton)을 고용하기도 했다. 네슬레는 미국이 성직자들에게 네슬레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30만 통 이상 우편으로 발송했다. 또한 PR 전문가로 명성이 높은 다니엘 J. 에델만을 고용하였고, 에델만은 네슬레가 일반 소비자들에 좀더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회사의 활동 내용에 대해 제3자의 승인을 받도록 충고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다양한 PR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이미지는 개선되지 못했고 비난세력도 잠재우지 못했다. 1981년 네슬레는 PR을 담당하던 두 기업관의 계약을 파기하였다. 현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제를 PR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항의가 점점 커져가자 네슬레는 인간적이고 책임있는 기업으로서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뢰성 확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모유 대용 식품 마케팅에 대한 WHO규정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네슬레는 자발적으로 이 규정을 따라 대중들에게 대한 광고를 중단하고 산모들에 샘플을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네슬레 이외의 다른 3개 미국 이유식업체들은 2년 후에 이 규정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네슬레는 자신들이 WHO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증해 줄 윤리단체로 이유식에 대한 감리교 태스트포스(the Methodist Task Force on Infant Formula)라는 조직을 구성하였다. 네슬레와 언론과의 관계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 예로 1981년 상반기 동안 <워싱턴 포스트>는 네슬레를 비난하는 기사를 91개나 실었다.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는 언론에 대처하는 정책을 개방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효과적이었던 이미지 회복 전략은 의료 전문가, 종교인, 시민 지도자, 국제정책 전문가 등 10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네슬레의 WHO 규정 준수 내용을 공개적으로 모니터하고 네슬레의 마케팅 활동으로 제기된 불만 사항들을 조사하도록 한 것이다. 이 자문위원회는 1982년 5월 설립한 네슬레 이유식감사위위원회로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에드먼드 S. 머스키를 회장으로 선임하여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머스키가 이끄는 감사위원회는 WHO 구정 중 네슬레와 의견 대립이 생긴 네 가지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WHO, 국제 네슬레 불매운동위원회, 유니세프의 대표자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분야는 교육자료, 라벨, 의료와 보건 전문가들에게 제공하는 선물과 병원에 무료나 대가의 일부만 받고 공급하는 물품에 대한 것이었다. 네슬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 자료를 배포한 사실을 인정하고 이유식과 모유의 사회적, 보건적 측면을 비교, 검토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유식 라벨에는 오염된 식수를 사용할 경우의 위험성과 모유의 우수성을 명확하게 명시했다. 보건담당 공무원들에게 개인적인 선물을 하는 것은 뇌물이나 특혜제공으로 의심받을 수 있으므로 엄격히 금지했다. 끝으로 병원에서 이유식 무료 샘플을 제공하는 것은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는 산모들에게만 국한하기로 하였다.

네슬레는 수년 동안 비난 세력을 적대적으로 대한 탓에 비판 여론과 불매운동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네슬레는 개발도상국에서 수백만 명의 아기를 사망하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네슬레 영양조정센터 소장인 라파엘 D. 페이건 주니어는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기업들은 소비자와 일반 시민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민감하게 대응하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기업들은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애써야 하며 함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11) 네슬레가 비판 세력들과 맞선지 10년 만에, 그리고 불매운동이 시작된 지 7년만인 1984년 초 대부분의 단체들이 불매운동을 중단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동안 네슬레의 손실액을 추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불매운동으로 최대 4,000만 달러까지 손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나자 소비자들은 평판이 더 나은 기업으로 발길을 돌렸다. 중요한 사실은 네슬레의 전 세계 매출액 중 이유식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작은 부분의 대외적인 이미지 손상이 다른 제품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불매운동으로 가장 손해를 본 곳은 네슬레 기업 중의 하나인 스토우퍼로 회의 및 연회사업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모임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부정적인 소문에 휘말리게 될까봐 다른 곳으로 개최지를 바꾸었다.

 

5. 토론

1) 네슬레와 같은 사업상 재앙은 처음부터 피할 수 있었을까?

2) 네슬레가 문제를 알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3) 불매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직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기존 세력에 맞서 싸울 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반체제 선동가들인가?

 

 

각주)-----------------

각주)----------------- 로버트 F. 하틀리, 윤리경영, eㅡ매니지먼트(주) 옮김(서울: 21세기북스, 2005), pp. 302-324.

“이유식 반대 운동을 통해 네슬레가 전술 훈련을 배우고 있다,” 마케팅 뉴스(1983년 6월 10일), p. 1.

커트 앤더슨, “병들의 전쟁,” 타임(1981년 6월 1일), p. 26.

미국 상원, 인권위원회, 건강과 과학적인 조사분과위원회, 개발도상국에서 이유식 마케팅과 판촉 심리, 95회 의회, 두 번째 세션, 1978년 5월 23일(워싱턴 D.C.: 정부출판국, 1978년), p. 6.

프라카시 세티와 제임스 E. 포스트, “개인적인 행동으로 인한 일반적인 결과: 저개발 국가에서의 이유식 마케팅,” 켈리포니아 매니지먼트 리뷰(1979년 여름), pp. 35-48.

레아 마르굴리스, “분유를 먹는 아이들: 사망률도 사업도 성장하다,” 비즈니스 앤드 소사이어티 리뷰(1978년 봄), pp. 43-49 참조.

더글라스 클레멘트, “분유 시장에서 최근 네슬레의 살인 행각,” 비즈니스 앤드 소사이어티 리뷰(1978년 여름), pp. 60-64.

존 스파크스, 네슬레 논쟁 - 불매운동에 대한 해부, 공공 정치 교육 기금(1981년 6월).

“이유식 제품 불매운동,” 비즈니스 위크(1979년 4월 23일), pp. 147-140.

"병속의 살인자,“ 이코노미스트(1981년 5월 9일); ”최근 네슬레의 살인 행각,“ pp. 60-64.

“네슬레가 동의를 얻어내다: 제품 불매운동이 중지되다,” 마케팅 뉴스(1984년 2월 7일), p. 5.